2015년 9월 3일 목요일

영어 배우기 싫어요

부모가 평생 잊지 못하는 기억이 있다. 평범한 일상에서 보석처럼 빛나는 순간이 있는데, 우리 첫째 아이가 영어를 배우기 시작했던 순간도 그 중 하나다.

2009년 여름에 미국에 도착했을 때 큰 아이는 한국에서 초등학교 1학년 한 학기만을 다니다가 온 상태였다. 한국에 있을 때 다니던 유치원에서 영어 알파벳과 간단한 영어 단어를 배운 것 빼고는 영어를 하지 못했다. 그런데 미국에 오니 2학년으로 배정되었다. 미국은 보통 가을에 새 학년이 시작하기 때문이다. 배정된 학교는 ELD가 없는 학교였기 때문에 2학년 정규반에 들어갔다. 아이를 잘 가르쳐주어서 지금도 잊지 못하는 2학년 선생님은 미세스 트레비노였다.

학교를 마치고 돌아온 아이에게 어떻게 지냈는지 물어봤다. 선생님이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단다. 개인 영어 교사를 붙여줄까 물어봤더니 영어 공부하기 싫단다. 도리어 왜 영어를 알아야 하냐고 반문했다. 철렁했다. 싫다는데 억지로 영어공부를 시킬 수는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선생님에게서 연락이 왔다. 학교에서 심각하게 지시를 따르지 않았단다. 첫째는 학교에서 종이접기를 많이 했다. 말을 못하는 첫째가 쉬는 시간에 혼자 지내면서 종이접기를 했는데 다른 아이들이 많이 신기해 하며 칭찬을 해줬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수업시간에도 종이접기를 하다가 걸린 것이다. 선생님이 종이접기를 하지 말라고 지적을 했는데 알아듣지 못했다. 여러번 말을 듣지 않자 접던 종이를 빼앗았는데 첫째가 강하게 낚아채면서 거부하더란다. 나중에 왜 그랬냐고 물어봤더니 무슨 말인지 몰랐고 선생님이 자기 종이를 빼앗아가길래 순간적으로 막은 거란다.

사실 미국학교에서 선생님 지시를 따르지 않는 것은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다(그렇지 않은 학교가 세상에 어디 있겠느냐마는). 지시를 따르지 않는 학생에겐 주의를 주고, 그래도 따르지 않으면 벌로 학교 사무실에 보내어지고, 그 다음엔 교장 사인이 들어간 경고장을 부모에게 보낸다. 부모는 아이에게 조치를 취하고 경고장에 사인을 해서 학교에 돌려보내야 한다. 첫째의 행동은 평상시라면 교장에게 보고되고 경고장이 날아와야할 정도로 심각한 행동이었지만 선생님이 첫째를 이해하고 많이 참은 것이었다. 그래도 첫째는 영어를 배울 생각이 없었다.

아빠의 회사일 때문에 어쩔수 없이 미국에 따라온 아이가 선생님 얘기도 알아 듣지 못하고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는 모습에 마음이 아팠다.

그러던 어느날 저녁. 잠자리에 드는 아이에게 평소처럼 기도를 해줬는데 뜻밖의 얘기를 했다. 영어공부가 하고 싶다고. 왜 영어 공부가 하고 싶은 지 물어봤다. 오늘 반친구 T가 학교에서 울었단다. 난 T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첫째의 옆자리에 앉은 짝꿍인데 몇 번 첫째를 놀리기도 하고 조금 힘들게 했던 아이였다. 그 T가 오늘 교실에서 울었는데 옆에서 그 모습을 보면서 안쓰러웠단다. T를 달래 주고 싶었는데 입에서 나오는 말은 그 아이의 이름밖에 없더란다. 답답했다고. 처음으로 영어를 배우고 싶어졌단다.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혼자 종이접기만 하던 아이가 우는 짝꿍을 보며 영어를 배우고 싶어졌다는 이야기를 할때 살짝 울컥했다. 몇 년이 지난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기억이다.

나는 영어 강사를 수소문해서 매주 한 시간씩 2년간 영어 교습을 받도록 해주었다. 첫째는 우여곡절을 겪으며 천천히 학교에 적응해 나갔다.